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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지숙전설
구분 민속/전설
내용 지숙전설

蟻蟻坪里(갬발)에 富者 三人이 살고 있는데 舍人洞에는 李월안 집이있고 玉流洞에는 李氏(全州)의 집이 있고 狐洞(여술)에는 어떤 富者가 살고 있는데 이 富者들은 서로 누구네가 富者인가 또는 누구네가 노적누 리가 크고 높은가 서로 시기들을 하는가운데 가을에 秋收를 하여 마당에 野積을 하고 그 꼭대기 위에 올라서서 서로 쳐다 보는 습관적 시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그中 舍人洞 李氏집에 하루는 大師가 와서 하는말이 집터에 比해서 담을 쌓되 지숙(女人을 제수로 집어 넣고 하는것)을 넣고 걽야만 富者가 계속된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그 후 이 말을 들은 李氏는 그말대로 自己 女子종을 지숙하고 담을 쌓았다 한다. 그때 그것을 본 종의 아들이 어미의 원수를 반드시 갚고자 결심하고 그집을 뛰쳐 나와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수十年 후에 大師로 변 장하고 李氏집에 와서 하는 말이 계속 부자가 되려면 자기가 정해 주는곳에 연못을 파야 된다 하고 돌아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대로 더 부자가 될려고 방죽을 파는데 그곳에서 南宮氏네 誌石(지석)이 나왔다 는 것이다.

李氏집은 그후 亡해 버리고(敗家), 南宮氏네는 始祖山所를 찾게 되어서 그 山所가 이곳에 現在까지 수호되여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玉流洞에 사는 李氏富者는 成宗大王의 四子 完原君의 四代孫인바 이름은 琓이였다. 이분이 작고하여 墓를 쓰려고 며칠을 두고 역사를 하는데 그분의 딸이(평강 蔡氏네 집으로 시집을 간 사람)墓地를 꾸미 는 사람들에게 술과 좋은 안주를 퍼다 주어서 호감을 사고 밤중에 남 몰래 묘 쓸 광중안에다가 물동이로 물을 퍼다 붓고 나서 일꾼들을 시켜 여기 물이 지걱지걱 나니 이곳이 不吉하다는 말을 하게 하여서 친정 아 버지 묘를 쓰지 못하게 속이고 장일을 늦추게 하는 등 재간을 부리어 급기야는 친정아버지 墓를 대천 花山里 화현부락 후록에묻게 했다는 것이다.

그 후 그 女子는 自己 시아버지나 그곳이나마 모시게 해달라고 하여 그 자리에 다가 자기 시아버지를 그 장소에 쓰게한바 그후부터 蔡氏후손들이 번창하고 그 子孫中 蔡번암 政丞이 낳고 그外에도 높은 벼슬하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한다. 그 墓所에 묻힌 분은 和順골 사리를 지낸 분이라 한다. 그 자리가 名堂이라 하여 지금도 地士들이 자주 찾아오고 있다. 여수골 부자는 상세한 전설을 알길이 없으나 이 부자도 갬밭에서 살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전하여 온다. 玉流洞 부자의 孫으로 작고한 李錫九씨가 이부락에서 살았는데 全國에서 토지 소유자로는 제일 가는 분이었다. 조곡 3만석까지 받은 부자인데 이렇게 부자가된 연유는 상세치 않으나 전설에 의하면 이분은 祖父 가 극빈하여 바지게 장사를 하여 연명하는데 아침에 죽을 쑤어 물만 마시고 건덕지는 쌓아 가지고 廣川장에 가서 이것을 먹으며 바지게를 팔고 하여서 生計를 이어 가는바 하루는 집에 돌아와서 셈을 해 보니 엽전 (葉錢) 3分이 더 왔단다. 그래서 그분은 그 다음장에 가서 바지게 되메기 장사에게 도로 반환하고 왔다는 것이고 祖父에게 孝道를 지성껏해서 孝子소리도 듣고 칭송이 자자 했다고 한다.

그 良心은 世上사람들이 본 받을 만한 정직한 분이고 개똥뱀이 논과 火田밭에 거름을 주기 위하여 食前(새벽)부터 개똥오쟁이를 걸머지고 순전히 개똥으로 거름해서 농사를 짓고 치산치수에 힘썼다 한다. 이렇게 정직하고 근검절약하여 이름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분은 庇仁 골사리까지 한분으로서 사정에 의하여 서울로 이사하여 작고했다. 그 후 농지개혁으로 상당한 재산이 남의 것이 되었단다. 그러나 그 子孫들이 現在 서울에서 그 재산 여작으로 育英事業에 투자 하는등 私學에 지대한功을 세워 현재도 칭송이 높다 한다. 지금도 이 갬밭의 과거 부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정직 근검한 생활의 표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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